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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파이아 사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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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파이아 사비나는 폼페이 출신으로, 로마 황제 네로의 두 번째 부인이자,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의 친위대 대장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와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와의 결혼을 거친 여성이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를 가졌으며, 네로의 모친 소 아그리피나를 살해하도록 꼬드겼다는 의혹을 받았다. 네로의 통치 기간 동안 유대인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촉구하기도 했으나, 65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네로가 발로 찼다는 설과, 사고사 혹은 유산이나 출산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설이 존재한다. 포파이아는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포파이아의 대관'을 비롯한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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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파이아 사비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팔라초 마시모 알레 테르메에 있는 포파이아 사비나 흉상
팔라초 마시모 알레 테르메에 있는 포파이아 사비나 흉상
칭호아우구스타
배우자
출생일30년
출생지폼페이, 이탈리아
사망일65년 (34–35세)
사망지로마, 이탈리아
매장지로마, 율리우스 가문의 무덤
배우자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
오토
네로
자녀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
아버지티투스 올리우스
어머니포파이아 사비나 (연장자)
왕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결혼을 통해)
로마 황후
재위62년 – 65년

2. 어린 시절

포파이아 사비나는 폼페이에서 티투스 올리우스와 대 포파이아 사비나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 폭발 이후에도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그의 가족들은 메난드로의 집을 사들여 거주하게 된다.

티투스 올리우스는 티베리우스 시절 로마의 재무관이었다. 루키우스 세야누스와의 악연으로 공직에서 안정된 경력을 쌓지 못하고, 피케니움 출신이라는 미천한 배경 때문에 정치적 이득을 보지 못한 채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어머니 대 포파이아 사비나는 당대의 현명한 여성으로, 티투스는 그녀를 "그녀의 날들 중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이라 회고했다. 대 포파이아 사비나의 아버지였던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는 서기 12년부터 35년까지 모에시아의 집정관을 지냈다.

2. 1. 출생과 가문

빌라 포파이아: 개인 욕장의 칼다리움.


포파이아 사비나는 서기 30년 폼페이에서 티투스 올리우스와 포파이아 사비나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3] 아버지 티투스 올리우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퀘스토르(재무관)를 지냈다. 올리우스는 친위대장 루키우스 아이리우스 세야누스와의 친분 때문에 공직을 얻기 전에 몰락했다. 티투스 올리우스는 피케눔(현대 마르케아브루초, 이탈리아) 출신으로, 제국 정치에서 알려지지 않은 조연이었다. 그는 서기 31년에 사망했다.

어머니 포파이아 사비나는 타키투스가 부유하고 "그 시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칭찬한 뛰어난 여성이었다. 서기 47년에 그녀는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음모로 자결했다.[3]

외할아버지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는 서기 9년에 집정관이었고, 서기 12년부터 35년까지 모에시아의 총독이었다. 그의 집정관 재임 기간 동안 결혼을 장려하기 위한 법이 통과되었다. 사비누스는 서기 26년 트라키아에서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군사적 개선을 받았다. 서기 1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는 그리스와 다른 속주의 제국 총독(또는 지사)으로 재직했다. 그는 서기 35년 12월 말에 자연사했다.

포파이아의 가족은 폼페이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일반적으로 그들이 카사 델 메난드로의 소유주였을 것으로 여겨진다.[5] 특히 헤르쿨라네움 근처 오플론티스에 있는 호화로운 빌라 포파이아는 로마 외곽의 주요 거주지로 여겨진다.

2. 2. 폼페이와의 연관성

포파이아 가문은 폼페이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일반적으로 그들이 카사 델 메난드로(기원전 4세기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그림이 있는 폼페이의 집)의 소유주였을 것으로 여겨진다.[5] 포파이아의 폼페이 출신을 시사하는 대부분의 증거는 79년 베수비오산 폭발로 파괴된 마을의 20세기에 발굴된 유물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인근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된 법적 문서에는 그녀가 폼페이 지역에서 벽돌 또는 타일 사업의 소유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헤르쿨라네움 근처 오플론티스에 있는 호화로운 빌라 포파이아는 로마 외곽의 주요 거주지로 여겨진다.

3. 결혼 생활

포파이아 사비나는 서기 44년 14세의 나이로 에퀴테스(기사 계급) 출신인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22] 크리스피누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세 초기인 41년부터 51년까지 친위대장을 역임했으나,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섹스투스 부루스로 교체되며 해임되었다.[22] 포파이아는 크리스피누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를 낳았으나, 이 아들은 훗날 네로에 의해 익사했다.[22]

이후 오토와 재혼했다. 타키투스는 포파이아가 네로와 가까워지기 위해 오토와 결혼했다고 주장한다.[7] 네로는 포파이아에게 반해 그녀를 자신의 정부로 삼았고, 오토는 루시타니아 총독으로 좌천되었다.[7]

그 후 네로는 포파이아와 결혼하여 황후로 삼았다. 타키투스는 포파이아가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살해하도록 부추겼다고 기록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22] 포파이아는 네로에게 정실 부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살해하라고 압박했고, 결국 옥타비아는 처형되었다. 63년 1월 21일, 포파이아는 딸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를 낳았으나, 딸은 생후 4개월 만에 사망했다.

3. 1.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와의 결혼

포파이아 사비나는 서기 44년, 14세의 나이로 에퀴테스(기사 계급) 출신인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22] 크리스피누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세 초기인 41년부터 51년까지 친위대장을 역임했으나,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섹스투스 부루스로 교체되며 해임되었다.[22] 포파이아는 크리스피누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를 낳았으나, 이 아들은 훗날 네로에 의해 익사했다.[22]

3. 2.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와의 결혼

포파이아는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와 이혼 후, 네로의 친구였던 오토와 재혼했다. 타키투스는 포파이아가 네로와 가까워지기 위해 오토와 결혼했다고 주장한다.[7] 네로는 포파이아에게 반해 그녀를 자신의 정부로 삼았고, 오토는 루시타니아 총독으로 좌천되었다.[7] 오토와의 이혼 시기에 대해 타키투스는 58년,[7] 수에토니우스는 59년으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7]

3. 3. 네로와의 결혼과 황후 시절

포파이아는 네로와 가까워지기 위해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와 결혼했다는 설이 있다. 타키투스는 58년, 수에토니우스는 59년에 네로가 오토에게 포파이아와 이혼하라고 명령하고 오토를 루시타니아 총독으로 보냈다고 기록했다.[22]

타키투스는 포파이아가 59년에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살해하도록 부추겼다고 기록했다. 소 아그리피나가 네로와 포파이아의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에 제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네로가 62년에야 포파이아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22]

소 아그리피나 사망 후, 포파이아는 네로에게 정실 부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살해하라고 압박했다. 옥타비아는 네로의 첫 부인이자 의붓누이였는데, 8년 동안 자녀가 없었다. 62년에 포파이아가 임신하자 네로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불임이라고 주장하며 12일 후 포파이아와 결혼했다. 옥타비아는 캄파니아, 판다테리아 섬으로 추방된 후 처형되었는데, 이는 간통 혐의로 실각한 황실 구성원이 받는 일반적인 형벌이었다. 63년 1월 21일, 포파이아는 딸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를 낳았으나, 딸은 생후 4개월 만에 사망했다.

포파이아는 우유 목욕이 질병을 예방한다고 믿어 즐겨 했다. 타키투스는 그녀를 야심적인 여인으로, 요세푸스는 신앙심 깊은 여인으로 묘사했다.

포파이아의 사망 원인과 시기는 불확실하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65년 여름, 네로가 경마에 시간을 너무 많이 쓴다고 다투다가 분노한 네로가 그녀의 복부를 발로 차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11] 타키투스는 65년 킨퀘니얼 네로니아 이후 네로의 발길질이 "우발적 폭발"이었다고 주장하며,[12] 네로가 독살했다는 주장은 믿지 않는다고 언급한다.[12] 카시우스 디오는 네로가 배를 덮쳤지만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13]

현대 역사가들은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 카시우스 디오가 네로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포파이아가 유산이나 출산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고 본다.[14] 낡은 파피루스 조각에 암호화된 그리스 시는 포파이아가 "여신이 모는 전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 전 네로에게 사랑스러운 작별 인사를 했다"고 묘사하여, 그녀의 죽음이 네로의 폭력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15]

포파이아가 65년에 사망했을 때, 네로는 깊이 슬퍼했다. 포파이아는 국장을 치렀고, 미라 처리되었으며, 딸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와 함께 신적 영예를 받았다.[16] 타키투스는 포파이아가 다양한 허브와 향신료로 채워져 미라 처리되었고 율리우스 묘에 묻혔다고 기록했지만,[17] 실제 매장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네로는 장례식에서 1년 치 아라비아산 유향 생산량을 태웠다고 한다.[18]

4. 죽음

65년, 포파이아는 네로에게 전차 경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불평했다. 이에 격분한 네로는 포파이아의 배를 발로 찼고, 이로 인해 포파이아는 사망했다. 당시 포파이아는 네로의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며, 아이 역시 사산되었다. 네로는 포파이아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고,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포파이아의 시신은 이집트식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방부 처리는 하지 않았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로가 포파이아를 독살했다는 설을 부정하며, 부부 싸움 중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고로 인해 포파이아가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네로는 포파이아를 열애했고, 무엇보다 아이를 원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수에토니우스는 네로가 전차 경기에서 늦게 돌아오는 것에 대해 포파이아가 꾸짖자, 네로가 포파이아의 하복부를 발로 차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포파이아의 첫 남편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는 포파이아가 사망한 해에 네로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듬해인 66년에 처형되었다. 포파이아가 낳은 아들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50년 또는 51년 출생) 역시 66년에 낚시를 하던 중 네로에 의해 15세의 나이로 처형되어, 포파이아의 직계 혈통은 끊어졌다.

5. 사후

네로는 포파이아의 죽음에 깊이 슬퍼하며 국장을 치렀다.[1] 포파이아의 시신은 이집트식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방부 처리는 하지 않았다.[1]

네로는 포파이아를 닮은 남성 노예 스포루스를 거세시켜 포파이아처럼 분장하게 하였고, 그를 늘 포파이아라 불렀다.[1]

6. 평가

타키투스는 포파이아를 야심이 많고 냉혹한 여성으로 묘사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포파이아가 네로에게 접근하기 위해 오토와 결혼했으며,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살해하도록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또한 가이우스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와 결탁하여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를 은퇴시키고, 네로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이혼하도록 압박했다고 설명한다.[1]

반면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포파이아를 매우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긍정적으로 기록했다. 이러한 평가의 차이는 당시 로마 사회 내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으로, 포파이아가 유대인 사회의 보호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1]

수에토니우스는 포파이아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네로와의 말다툼 중 네로에게 복부를 차여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포파이아를 독살했다는 설도 언급했지만, 자신은 부부 싸움 중 사고사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1]

7. 대중문화 속 포파이아

포파이아 사비나는 오페라, 영화,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등장인물로 자주 묘사된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인 1642년 작 《포파이아의 대관》에서 포파이아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네로 황제를 조종하여 자신과 결혼하고 로마의 황후가 되려는 냉소적인 음모를 꾸민다. 그녀의 책략에는 자신의 계획에 반대한 세네카의 처형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계획은 드라마 마지막에 성공한다.[20]

헨델의 1709년 오페라 《아그리피나》에서도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기만과 조작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등장한다. 음모를 꾸미는 인물은 네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이며, 포파이아는 순진한 여주인공으로 묘사된다. 포파이아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오토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아그리피나는 그들의 경쟁을 자신의 이점으로 활용하려 한다. 포파이아가 아그리피나의 기만을 간파하고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만, 결국 그녀의 진정한 사랑인 오토와 결합한다.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쿼바디스》를 각색한 여러 영화 및 TV 버전에도 등장한다.


  • 1951년 영화에서는 패트리샤 라판이 연기했으며, 네로가 로마 대중의 마음을 돌아서게 한 책임을 그녀에게 돌린 후 질식사한다.[20]
  • 1985년 국제 TV 미니시리즈 《쿼바디스》에서는 크리스티나 레인스가 연기했다.
  • 2001년 영화 쿼바디스에서는 아그니에슈카 바그너가 연기했다.


1932년 영화 《십자가의 표식》에서 포파이아(클로데트 콜베르)는 양성애자로 묘사되며, 여성 노예에게 함께 목욕할 것을 암시하지만 로마 병사 마르쿠스 수페르부스 (프레드릭 마치)를 갈망한다.

다른 작품들에서의 포파이아 묘사는 다음과 같다.

  • 1976년 BBC TV 시리즈 《나, 클라우디우스》: 샐리 베이즐리 연기.
  • 1956년 이탈리아 영화 《네로의 정부》: 브리지트 바르도 연기.
  • 2003년 영화 《보디카》(미국에서는 ''전사 여왕''): 카라 토인턴 연기.
  • 2006년 BBC 다큐 드라마 《고대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캐서린 맥코맥 연기. 네로의 오년제 네로니아 공연 중 사소한 결함을 무심하게 언급한 후 네로에게 발로 차여 죽는 것으로 묘사.
  • 1979년 오페라 영화 《포페아의 대관》: 레이첼 야카르 연기.
  • 2004년 드라마 영화 《네로》: 엘리사 토바티 연기.
  • 1968년 영화 《프로듀서》: 레오 블룸 (진 와일더)이 막스 비알리스톡 (제로 모스텔)에게 "네로가 포파이아를 덮친 것처럼" 자신을 덮치지 말라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에서 언급됨.
  • 2013년 폴란드 영화 《임페라토르》: 에바 호르니치 연기. 포파이아가 네로보다 오래 살아남아 오토와 재회한 후 게르마니아에서 죽는 것으로 묘사.[21]
  • 1965년 닥터 후 이야기 《로마인》: 케이 패트릭 연기.
  • 고딕 메탈 밴드 트라제디 극장(Theatre of Tragedy)의 앨범 《에기스》: 포파이아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Poppæa" 곡 수록.
  • 기라이 시즈야의 만화 《권투 암흑전 세스투스》 시리즈
  • 토리 미키, 야마자키 마리의 만화 《플리니우스》: 본작에서는 죽음의 원인을 네로 이외의 누군가에 의한 독살로 묘사.

참조

[1] 서적 Roman Women: Their History and Habits Barnes & Noble
[2] 문서 Tacitus, Annals XIII.45–46, XIV.63–64, XVI.6
[3] 간행물 Oxford Class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4] 논문 The Temple and Birthplace of Diva Poppaea Cambridge University Press on behalf of The Classical Association 2010-12
[5] 서적 The Fires of Vesuvius: Pompeii Lost and Found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6] 서적 The Augustan Aristocracy Clarendon Press
[7] 문서 The Lives of Caesars Life of Otho 3
[8] 문서 Tacitus, Annals XIV.1
[9] 논문 Whatever Happened to Lady Agrippina?
[10] 논문 The Alleged Jewish Tendencies of Poppaea Sabina Oxford University Press 1959-10
[11] 문서 The Lives of the Caesars Life of Nero 35.3
[12] 문서 Annals XVI.6
[13] 문서 Epitome of Book 62
[14] 서적 Political Dissidence Under Nero
[15] 웹사이트 To Heaven on a Chariot: The Incredible Story of Poppaea Sabina https://archive-ouve[...] 2022-04-25
[16] 서적 Nero https://www.worldcat[...] Routledge 2005
[17] 서적 Annals, 16.6
[18] 문서 "Regum Externorum Consuetudine: The Nature and Function of Embalming in Rome" 1996-10
[19]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C. C. Little and J. Brown; [etc., etc. ]
[20] 문서 Lives of the Twelve Caesars Nero XXXV
[21] Youtube Emperor, Imperator a film by Konrad Łęcki (in Latin and Teutonic) https://www.youtube.[...]
[22] 논문 Whatever Happened to Lady Agripp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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